후커우 천고에 세차게 흐르다

  • 역사문화
  • 출처:후커우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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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시 시간:2021/10/27

후커우 천고에 세차게 흐르다

(1)기원1753년,폭포는 멍먼으로 부터 5천미터 남짓됬습니다.

저작:《의천현지》. 시기:천건륭18년(1753년). 해방 전 의천현 삼부 현지 중 가장 이른 천곤륭 18년(1753년)《의천현지》의 편찬자 오명은 황하 후커우를 “상류가 넓고 광활하며 아래로 가며 좁아져 주전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라 지목했습니다. 또 멍먼을”평좌 리에 속하며 현에서 동북 방향으로 100리 떨어진 황하는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데 결국 무너져 내려서는 안됩니다.”라 말했습니다. 그의 저서《후커우고》에서 옜사람들의 문헌 중의 일부 진실되지 못한 점을 짚어냈으며 수정하여 훗날 후커우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제공했습니다.

(2)기원813년,폭포는 멍먼으로 부터 천미터 남짓됬습니다.

저서:《원화 군 현지》작자:이길 포 시기:원화 팔 년. 유형:당나라 시기 중국 지리학 저서에서 후커우에 대해 기재했는데 석조라 불렀습니다.”강에 산이 있고 동굴은 웅덩이와 같고 물은 칠십 여치나 되게 흘러내린다.”라고 말했으며 또한”석조는 길이 천보에 삼십보 더 되어 보인다.”라 하였는데 이는 확실히 역도원이 말한 것과 부동한 바 이는 후커우 폭포가 상류로 이동되었음을 보여줍니다.《원화 군 현지》은 당 현종 원화 팔 년(813년)은 역도원이 세상을 뜬 북원 효명제 효창 삼년(527년)보다 286년 지난 다음입니다. 역도원 이후의 286년간 후커우 폭포는 멍먼에서 상류로 천보, 강바닥이 천보 가량 침식됐으며 30보가량 웅덩이가 깊어졌으며 멍먼에서 오천미터 가량 떨어진 용왕찬 부근까지 이동하여 십리용조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상은 1500여 년 이래 후커우의 역변의 역사입니다.

 (3)기원전 200년,폭포가 멍먼에서의 위치입니다.

저작:《산해경》. 작자:질명. 시기:선진 시기. 유형:신화 전설에 의거한 가장 오래된 기서.”멍 먼산”이라고 불리며 주나라와 진나라 시기 발견된 《산해경》에서는”동남 삼백이 십리, 멍먼에 가까우며 창옥이 많고 아래에는 명반석이 많습니다.”라 기재하였습니다.

(4)북위 시기,저서에서 전국시기의 폭포와 멍먼에 대해 기술했습니다.

저작:《수경주》.작자:역도원.시기:북위말기.유형:고대중국지리명작.멍먼 및 폭포에 대해 자세한 묘사를 하였습니다:”《회남자》왈:용문이 열리지 않고 구멍이 여직 뚫리지 아니하였으며 강은 멍먼위에 있고 큰 파도는 역류하며 구릉이 없고 홍수가 져서 대우가 와서 처리하자 곧 멍먼이 생겨났도다.《목천자전》왈:”멍먼은 용문의 입구이며 실제로 강의 거대한 요충지여서 "멍먼진"이라고도 불리는데 전설에 의하면 용문은 대우가 만들어 낸 것이며 수로는 물에 씻겨 매우 광활한 바 아주 긴 통로를 만들어냈고 양쪽은 절벽인데 높은 곳의 거대한 돌은 마치 절벽에 걸려 떨어질 것 같습니다. 옛사람은:"물은 대장장이의 끌이 아니지만 암석을 뚫을 수 있습니다."확실히 그렇듯이 물들이 서로 부딪혀 흰색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물이 안개에 적셔진 듯 보입니다. 만약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더욱 가슴이 쫄깃해지는 것 같습니다. 강물은 파도를 일으키고 천리 폭포에서 아래로 거침없이 쏟아져 내려오는데 마치 화난 짐승과도 같이 웅장한 기세로 세차게 흘러 겹겹이 쏟아져 강하류로 내려옵니다. 이제야 폭포가 흘러내릴 때면 네필의 말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라고 기재되어있는데 이곳의 폭포는 멍먼에 위치하였다고 밝혔지만 황하와 인접한 후커우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5)전국시기,”후커우”의 이름으로

시기:전국 유형:중국의 첫 지역지리 저작인 바 가장 일직이 전국시기의《상서·우공》중에 기재하기를 “후커우에서 홍수처리를 끝마쳤고”,”후커우, 뢰수. 태악에 견준다”, 모두 대우가 홍수를 처리함에 있어 노선과 책략과 연관되어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후커우 만 언급했고 폭포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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